나의 어머니와 생전 처음 하루를 보내면서
나는 충청 남북도 태생으로 혼자 1963년도 연세의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안면도 태상으로 의사가 됐다.
1957년도 세브란스 의대를 입학 할때는 대전,부여, 청주에서 한명씩 그리고 안면도에서 한명 총 4명이 충청 남북도 태상이 입학 했었다. 그 중 1명은 학교에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나머지 2명은 낙제하고 나만이 입한후 6년 만에 충청 남 북도 태상으로 졸업했다.
서울에서 6년동안 학교를 다니는 동난 나의 어머님과 아버지는 한번도 나를 보러 오시지 안햇다. 사실은 안 하시기 보다 못 오셨다. 그러니 졸업 하던 하루 전에 아벼님은 서울에 오셨다거 그다음 날 내 졸식날에 오셨다. 졸업 식이 끝 나자 마자 아버님은 안면도 집으러 거셨다.
내가 졸업하자 마쟈 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에서 무의 촌 인턴 수련과정을 6개월 수련 하고 서산 보건소 의무실장으로 환자를 봤다. 매 주말이 되면 버스를 타고 안면도 어머님 아버님을 뵈러 가서 그 곳에 오는 한자를 무료로 보아줬 다.
무의 촌 인턴 수련과정을 받는 중 서산 보건소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안면도 장등개에서 사시는 부모님을 뵈로 갔었다.
하루는 어머님이 닭걀 30개 정도 모여 싸가지고 장문 장에 가자고 하셔서 두 말 할 것 없이 예 하고 따라갔다.
우리 집에서 장문 까지 왕복 약 이 십리 길 이었다. 어머님은 항시 몸이 불편 하셧다. 의과 대학 다닐 때 청진기로 진찰 해보니 승모판 Mitral valve 와 대동맥 판막에 이상이 있다고 내가 처음 진단헀다.
나는 두 말 할 것 없이 왕복 이 십리길을 걸어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안했다,
시장애서 닭걀을 팔고 조기 몇마리를 사가지고 집으로 오는 시골 길에서 엄마 얼굴에 기쁨이 가닥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썼다.
그 때 우리 뒤를 따라오던 시골 아주마가 나의 엄마를 보고 옆에 있는그 젊은 이는 누구냐고 물엇다.
엄마는 서슴치 않고,
내 아들이라고 바로 답했다.
나의 어머니는 베적삼에 무명 치미를 입었다.
머리에는비녀를 꼽고.
류마치성
심장병으로 병색이 가득 차고 꼬조조한 시골 농부가 틀임 없었다.
거기다가 헌겁으로 싼 조기 꼬리가 보였다.
아이고 그렇게 잘 생긴 아들.
크게 소리 소쳐 말 했다.
그 여편네는 무엇 하느냐고 물었다.
눈 하나 깜작 하지 않고.
의사라고 했다.
아아…
의학 박사님 하고.
그런 아들은 둔 안면도 아주마가 어디 있느냐고 ………….
나의 어머님이 그렇게도 좋아 하시는 것을 나는 처음 봤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나의 어머님이 나 의사로 만드신 것을 그 렇게 좋아 하시더라고요
나는 뇌졸중에 걸려 고생 하시는 1980 년도에 어머님을 미국에 모셧다.
나의 어머님은 장한 엄마이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