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My Father and MotherFor further information, please visit “drleepediatrics.com” and then Search. 더 많은 정보를 얻으시려면 drleepediatrics.com에서 Search에서 찾으세요
나의 어머님 나의 어머니I love my mom.■ 장한 어머니 표창 사진 뇌졸중 후유증으로 걷지도 못하시고 말도 못하시는 어머님과 자부가 신체적 언어로 눈길 접촉으로 대화하고 있다. 미국 커네티컷 주 하트포드 엘리자베스 공원에서. 어렸을 때부터 매해 이만 때가되면 장한 어머니 표창식이 한국에 있었다. 미국에서 사는 우리 한인들의 사회에서도 장한 어머니 표창식이 한국에서와 같이 매년마다 거행되고 있다. 우리 어머님께서는 몇 년 전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이런 장한 어머니 표창대상이 될 수 없다. 어떤 어머님은 살다가 본의 아닌 사소한 죄를 지을 수 있다. 남편을 일찍 여우고 혼자 살다가 굶은 어린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의 빵 한쪽을 주머니 속에 슬쩍 넣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죄인으로 취급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그 빵을 먹은 자식에게는 그 어머니는 장한 어머님이시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자식을 더 잘 가르치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 남들보다 더 나은 학교에 보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은 똑 같지 않은가? 이런 저런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 한 어머님들도 장한 어머님들이시다. 우리 어머님은 안면도 섬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9 남매들을 낳아 길으시고 그들 중 몇 자녀들은 이 세상을 부모님보다 또 나보다 더 먼저 이 세상을 갔다. 그러면서 나를 의과대학까지 보내셨다. 어머님은 병고에다 가난하고 불쌍하게 사셨다. 이곳 미국에 이민 오시기 바로 전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셨다. 그로 인해 말을 조금도 못 하셨다. 사랑하는 모자지간이 헤어 진지 10년 만에 미국에 오셨지만 이 아들과 언어로 대화를 한 번도 못 하셨다. 거기다가 미국에 이민 오신지 2년 만에 이곳에서 뇌졸중 재발로 갑자기 작고하셨다. 돌아가시기 한두 달 전 식구들에게 손짓을 하시면서 소리를 치시기에 식구들 모두가 가까이 가봤더니 손자들과 자식들이 그 동간 드렸던 동전 한 주먹을 자부에게 내놓이시면서 큰 아들에게 무엇을 사다주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 날은 바로 나의 음력 생일날이었다. 바로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셨다. 우리 어머님은 뇌졸중으로 말을 못하시는 불구자이시었다. 그렇지만 나의 어머님은 나에게는 틀림없는 장한 어머님이셨다. 이 세상에 장한 어머님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런 분들 중 누가 장한 어머님 표창을 특별히 받을 수 있나. 1981년 5월 9일 뉴욕 한국 신보 자유칼럼 John Sangwon Lee, M.D. 나의 아버지I love my dad.나의 어머님의 존함은 정향섭(丁香燮), 나주정(丁)씨, 정약용의 3대 후손, 고향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 월현리 개월. 아버지의 존함은 이시우(李時雨). 경주 이씨. 파는 석탄파, 경주 이씨 항렬 38세. 출생 고향은 충남 서산군 남면면. 한학만 조금 공부하셨다. 큰 아들 저는 미국 소아과 전문의, 한국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첫째 며느리는 약사, 작은 딸 상숙이는 간호사이고 목사, 첫째 손자 동형이는 네트워크 엔지니어, 둘째 손자 건형이는 미국 내과전문의, 손녀 딸 진이는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소지한 초등학교 교사이다. 외손녀 영은이는 간호사, 외손녀 딸 세영이는 은행가, 외손녀 미순이는 심리학 전공 미 커네티컷 주 노동부 근무, 외손자 정민이는 미 커네티컷 주 노동부 근무그리 만화가, 손녀 나리는 변호사이고 그의 남편은 판사이다. 그 외 더 많은 자녀들, 손자녀들, 증손자녀들이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마음을 갖고 감사하면서 열심히 일하면서 산다. 미국으로 이민 오신 후 아버지와 어머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큰 아들 저, 며느리, 손자들, 손녀와 같이 저의 집에서 사셨다. 이민 오신 후 3년에 젊은 나이에 작고하셨다. 너무도 마음 아팠다. 생각해 보면 두 부모님을 항상 모시고 살지 못해 죄송스럽다. 이 불효자 저를 용서해 주세요. ■ 나를 낳고 키워주신 나의 어머님과 아버님! 부모님을 공경하라 부모님에게 효도하라 부모님을 섬기고 보살펴 드려라. 부모님께 매일 인사를 드려라. 인간이 할 일이고 도리고 걸어 갈 정도이고 인간이 따라 가야하는 천리인 줄을 알면서. 머리서부터 손발 끝까지 자주 보살펴 드려라. 입은 옷이나 외풍에서 부모님들이 애원하시는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나를 남들에게 맡기지 않고 부모님 스스로 키운 것처럼 나를 시설로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부모님. 돈 보다 명예보다 너의 부모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나를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과 같이 먹고 놀고 소근 그리면서 살고 싶다. 사랑하면서 나의 집 아침 창가 햇살을 달게 먹으면서 나의 안방에서 너희들의 팔에 안겨 죽을 때 까지 살고 싶다. 부모님께 효도하라. 부모님을 사랑하라.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마음을 갖고 감사하면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라. ■ 나의 아버지 이시우나의 아버지는 경주 이씨 항열은 우(雨)자이고 존함은 이(李)자 시(時)자 우(雨)자이다. 시조는 신라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사로(斯盧) 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巖公) 알평(謁平)이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경주시 동천동에 경주이씨 시조 알평 경모비 (慶州李氏始祖諱謁平景募碑)가 있다. 나는 경주이씨의 항렬로는 39세이고 우리 아버지는 항렬로 38세이다 경주 이씨는 14개 대파로 나누어졌고 아버지는 석탄공파(石灘公派)에 속한다, 경주 이 씨 중 삼성 회사 사장 이건희씨는 항렬로 40세, 그이 아들 이재용씨는 항렬로 41세, 이명박(이상정) 전 대한 민국 대통령은 항렬로 39세, 이종걸 국회의원은 항렬로 37세, 이종찬 장군은 항렬로 37세이다. 아버지의 작은 아버지(나의 작은 할아버지)가 아버지 사촌(나의 당숙)과 같이 초등학교를 다니라고 남면에서 사는 아버지를 안면도에서 사시는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데려왔었다. 그러나 외아들 사촌 동생과 차별 대우를 받아 기분 나쁘다고 거기서 학교를 다니지 않고 남면 홀어머니가 사시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한학을 조금 공부했다. 4살 때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 품에서 자란 불쌍한 분이시었다. 불쌍하게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위로는 두 형님들과 두 누나들이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아버님의 체격은 보통 이상으로 크고 판단력이 좋고 머리가 좋으신 분이시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요즘처럼 자식들을 안아주고 업어주는 등 신체적 접촉을 해서 자식을 육아하는 자식 사랑 방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식 사랑 방법이 그렇게 중요한지도 몰랐을 것이다. 또 나를 비롯해 다른 나의 동생들을 좋은 눈길 접촉 사랑으로 키우실 줄도 모르고 나를 비롯해 9남매 자식들을 그냥 키우시고 교육시켰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이 어려서 학교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한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키려고 무척 애쓰셨다. 나는 특별히 아버님으로부터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자랐다고 생각한다. 자녀들을 기르실 때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목을 잡아주고 어깨를 살그머니 치고 때로는 안아주고 목욕을 시키면서 육체적 접촉사랑을 적절히 해주면 자녀들은 정말로 부모의 조건 없는 진정한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란다고 알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비스런 눈길로 자녀를 사랑하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로 또 몸짓 말로 자녀를 사랑하면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게 훨씬 더 잘 전달된다. 그래 만이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로 알고 그 자녀는 신이 나고 행복하게 자라고 커서 건전한 자존심을 갖고 살 것이다. 거기다가 시간이 나는 대로, 또는 때로는 시간을 따로 내서 자녀 하나만 데리고 둘이서 어디를 가서 그 자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녀라고 인정하면서 사랑하는 방법, 즉 집중적 관심적 사랑과 보살핌을 해주면 그 자녀는 행복하게 자라고 나중에 성인이 되서 그 사회에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건전한 자존심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이런 자녀 사랑방법을 잘 모르시면서 이런 자녀 사랑을 직접 간접적으로 나에게 해서 나를 사랑으로 훈련시키고 나를 키웠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이런 자녀사랑 방법을 책으로나 다른 여러 방법으로 나에게 많이 해 주셨다. 그 지방의 유지가 우리 집을 방문하면 항상 나를 불러 아버지의 옆에 앉히고 그 분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교육시키셨다. 처음 보시는 손님이 오시면 나를 불러 아버지 옆에 안처 놓고 그 손님에게 아버지가 인사를 하는 것을 나에게 보이셨다. 손님에게 ‘저는 이자 시자 우자입니다’ ‘앞으로 많이 지도편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공손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 나면 어떤 손님이 나보고 몇 살이냐고 물으면 나는 몇 살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그 손님은 ‘아주 똑똑하게 잘 생겼구먼’이라고 칭찬을 해주는 것을 몇 번 경험했다. 내가 안중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할 때도, 홍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도 졸업식에 꼭 오셔서 나를 축하해주셨다. 그러나 지금 같이 ‘잘했다’ ‘축하한다’ 라는 말씀은 한 번도 하시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도 다니시지 못하고 4세 때부터 아버지를 보시지 못하고 자라신 그 분의 아들 나를 한국의 일류 의과대학을 보내 졸업을 시키고 의사가 된 그 아들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가끔 곰곰이 생각해본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산 보건소 진료실의 의사로 근무할 때 농부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나하고 셋이서 홍성군 홍동면 외가댁에 같이 가자고 하셔서 나도 좋아했다. 셋이서 외가댁에 가는 도중 이곳저곳에서 사시는 아버지 쪽 친척들도 맞나 뵙고 또 어머니 쪽 친척들을 찾아가 뵙고 인사를 했다. 1963년도 서산군 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의사수가 나를 포함해 총 5명뿐 이었다. 어머님은 하루는 달걀 10개를 짚으로 싸서 팔려고 왕복 20리 길 안면 시장을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해서 나도 기쁘게 같이 갔었다. 그리고 어머님과 내가 사는 장등개 동네에 사시는 고모 댁, 큰어머니 댁,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댁에 가서 같이 인사를 했다. 어머님께서 시장에 다녀오시면서 나보고 하신 말씀이 생전 잊어지지 않는다. 안면도 장문시장에서 장등개 우리집까지 왕복 20리 이었다. 시장을 오고가는 중 사람들이 어머님을 만나면 ‘옆에 있는 젊은이가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들이라고 하면 깜짝 놀라면서’ ‘무엇을 하느냐’ 물으면 ‘의사’라고 하면 또 ‘깜작 놀랬다’고 하셨다. 그때 어머님 말을 아버님은 들으시고 얼굴이 훤해지는 것을 봤다. 초조하고 얼굴에 핏기도 없는 시골 아줌마가 ‘어디서 그런 아들을 뒀느냐고 깜짝 놀라더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낳으시고 기르시고 학교 보내시고 의사를 만드신 어머님이 아들 나와 같이 아주 행복한 시간을 가지셨다고 생각할 때 나도 아주 기뻤다. 그 후로 서산 보건소 무의촌 의료 봉사 일을 하는 동안 주말이 오면 서산에서 쇠고기를 사가지고 안면도 승언리 집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갔어었다. 거기서도 역시 진료를 받으러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 그러나 진료를 해주면서 진료비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 아버님 두 부모님을 눈으로 손으로 많이 사랑해드리고 오래 사시도록 봉양을 하지 못했던 것을 너무나 마음 아프다. 우리 아버님은 비교적 큰 농사를 지으셨다. 한때는 대농을 하셨다. 농사짓는 일꾼 머슴을 하나 두고 어머님을 돕는 여성도 한 분 두고 살았다. 아버지께서 하루는 서산읍을 버스로 갔다 오시는데 중 바로 옆 버스 좌석에 잘 아시는 분이 앉아있었다. 아버지의 옆에 앉으신 친구의 바로 앞에 30세 정도 되는 젊은 신사 한분이 버스의 안전 손 자비 대를 붙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의 옆 좌석에 앉으신 아버지 친구 분이 그 젊은이에게 ‘선생님은 어디를 가시느냐’고 물었다. 그 선생님은 ‘안면 중학교에 전근 간다’고 답변했다. 그 젊은이가 중장리 3구 장등개에서 사시는 이시우씨를 혹시 아느냐고 옆 좌석에 앉은 친구 분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눈웃음을 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 옆 좌석에 있는 사람이 서있는 선생님보고 ‘어떻게 그 분을 아느냐’고 반문했다. 그분의 아들 하나가 홍성중학교를 다닐 때 여름 방학에 그 분의 가정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방문했는데 암 닭 한 마리를 잡아주면서 하루 묵어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닭고기에 열무김치에 쌀밥을 실컨먹고 거기다가 농주도 한잔 마시고 편히 쉬어 갔다고 했다. 바로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그 친구 분이 아버지를 처다 보면서 이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소개했다는 말을 나에게 아버지가 그 어느 날 말씀하셨다. 나는 안면도 역사상 처음으로 연세대학교 의과 대학대학을 입학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누구든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고 축하하는 사람은 한 분도 없었다. 심지어는 큰 아버지, 고모님들, 사촌들, 이종 사촌들 그리고 다른 친척들 중 한 분도 축하해 주지 않으셨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안면면 면사무소 면장님께, 안면면 안면 지서장님께 매해마다 연하장을 보냈었다. 가끔 안면 면사무소나 지서를 지나갈 때 들어가서 면장님이나 지서장님께 안부 인사를 드렸다. 의과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의과대학 재학 증명서를 안면면 면사무소 병무계에 내가 직접 제출했다. 그 당시 의과대학 재학생들은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병역 징집 면제가 병역법에 따라 됐었다. 그런데도 의과대학 재학 1학년 때 나는 군 입대 징집 명령을 받았다. 공부하는데 하도 바빠서 글로만 징집을 면제해달라고 안면면 면사무소에 편지를 보냈다. 그 후 아무 소식이 몇 달 동안 없었다. 그러더니 하루는 안면면 지서에서 순경이 우리 집에 와서 나를 찾았다. 아버지께서 나가 인시하니까 ‘당신 아들 이상원이가 병역을 기피했으니 체포하겠다’고 하면서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아버지께 물었다. 그리고 주소를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마루에 서 있다가 안방에 들어가셔서 서울에 있는 동안 내가 보낸 편지 봉투를 마당에 서 있는 순경에게 던져주면서 공공 병역기피를 당한 내 아들의 서울 주소니 가서 체포하라고 큰 소리를 치셨다. 그 때 순경은 당황했다고 한다. 배가 고프면 이리 올라와서 술 한 잔을 자시고 점심을 같이 하자고 낮은 말로 제의했다. 그 순경은 순수히 응했다. 그 뒤로는 병역 기피문제를 더 이상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무의촌 의료 봉사를 2년 동안 하고 연세의대 정형외과 1차 레지덴트 수련을 받고 있는 중 징집영장을 또 받기 전까지는 병역 기피문제는 더 이상 없었다. 내가 안면도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6년 동안 다닐 때 의과 대학을 잘 다니도록 도와주신 분을 어머님과 아버지님, 그리고 나의 의과 대학 선배 김병규 의학 박사님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안면면 면사무소에서 의과대학 재학 증명서 제출 신고를 고의적으로 누락시켜 의과대학을 다니는 동안 공공 징집기피자가 되게 됐다. ■ 인정이 많은 나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인정이 많으신 분이시었다. 아버지 나이 4세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유아기 학령기 사춘기 동안 자가 아버지로부터 사랑스런 눈길 접촉 사랑, 포근히 아나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긁어 주면서 해주는 신체적 접촉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셨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가 자랄 때 아버지 혼자만 데리고 어디를 가서 집중적 사랑과 보살핌을 하나도 못 받고 홀 어머님 슬하에 자라셨다 아버지 막내 여동생이 임신됐을 때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셨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바로 위아래 남매간이어서인지 아버지와 막내 고모 둘 사이는 특히 우애가 더 많았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태어난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을 물심양면으로 더 많이 아버지께서 도와주시는 것을 봤다. 나의 아버지는 두 큰 형님이 있었다. 아버지의 큰 형님 즉 나의 첫째 큰아버지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으나 아들 하나 즉 나의 사촌 이상현을 경회대학교 법대까지 교육시키셨다. 둘째 큰 아버지는 가난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번 돈으로 첫째 큰아버지로부터 스스로 제금 나고 둘째 큰아버지를 제금 내 줬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나의 사촌들 즉 아버지 조카들이 장가갈 때 준다고 돼지를 기르셨다. 가지고 계시던 논을 팔아 조카의 대학교 학자금을 보태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의 생일날이 오면 어머님은 음식물을 많이 차리고 씨 암 닭을 잡아 동네잔치를 했다. 둘째 큰아버지님과 고모부님 그리고 당숙님을 초청해서 식사를 하면서 집에서 담은 농주로 자가 생일 잔치를 하셨다. 사는 동네도 안면도 내 육간이 하나도 없었다. 1년 내내 안면도 내에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사 먹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 소를 잡아 추석 잔치를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소를 잡는다고 해서 나도 소 잡는 구경을 갔었다. 그 동네 머슴이 소 고삐 줄을 끌고 산기슬기로 가더니 소머리를 도끼머리로 쳐 소를 죽였다. 참 불상 했다. 동네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죽은 소의 껍질을 벗겼다. 그 다음 배를 갈랐다. 간과 지라, 콩팥이 보이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떠오르고 따뜻한 간 덩어리를 죽은 소 배 속에서 칼로 떼 낸 후 작게 잘라 소금에 묻혀 생으로 먹느라고 정신들이 없었다. 입들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생각하면 야만인들 같았다. 소고기를 생견 구경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흙수저 계급층 분들이 소고기 갈망증에 분명히 걸려 있었다. 소고기를 생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자연현상이었다고 지금 생각해본다. 안면도 섬 농촌 사람들에 생긴 소고기 갈망증의 증상!!!!!!!!!!!. 집에 가지고 가서 요리해서 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응급상황이었던 것 같았다.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소 큰 다리 하나를 사가지고 오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당시 소를 잡는 것이 불법이었다. 소를 잡은 사람이 소 다리 하나를 지게다 지고 안면면 지서에 갔다 줬다는 말을 들었다. 소 다리 하나를 사가지고 오셔 한두 달 동안 싫컨 먹을 수 있겠다고 나는 입맛을 다셨다. 추석날이 왔다. 아버지는 나보고 그 동네에서 사시는 김 서방 박 서방 모든 어르신 분들을 다 모셔오라고 해서 그 분들에게 소고기 식사를 대접했다. 그러고 보니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겠다고 좋아 했던 쇠고기는 거의 다 없어졌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동네 어르신 분들을 다 모셔다가 농주로 고기로 밥을 대접하는 것을 봤다. 나는 홍성 고등학교 다닐 때나 의예과를 다닐 때는 정월 초하루 설날은 그 동네 집집마다 찾아가서 농부님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정말로 농촌에서 초등학교도 가지 못하고 농사만 지시는 흙수저 계층 어르신 분들한테 세배를 하니 그 분들은 깜짝 놀란 기분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 당시 안면도 내 유지이신 국민 학교 선생님들, 지서장, 면장님에게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새해 연하장을 보냈다. 내가 서울에서 의예과와 의과대학을 6년 다니는 동안 명절이 오면 안면도 집에도 못가고 쓸쓸히 혼자 지냈던 몇 번 있었다. 한 번도 누구한테도 초청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럴 때 나의 아버님을 많이 생각해 봤다. I LOVE MY MOM DAD. 한국에서 위암수술 치료를 받으신 후 미국 이민을 오셔 자식 자부 손자들과 나의 셋째 동생 간호사, 목사 상숙과 나
나의 여동생 상분, 그의 남편 득노와 그리고 초카 정민 여동생 상분이는 장남인 나 대신 부모님과 동생들을 돌보느라고 수고를 많이많이 했다. 감사들인다. ■ 한국에서 위암수술 치료를 받으신 후 미국 이민을 오셔 자식 자부 손자들과 3년 동안 위암 추적치료를 받으시는 중 돌아가셨다.
다음은 아버님의 시 (1978년)양춘가절 호시절꽃이 떨어지니 봄 산이 빈 것 같고새가 울어도 눈물을 보지 못한다.녹음 방초난 만산(萬山)에 홍녹이 되고봄소식은 가고 여음(름)철이 와고나춘몽(春夢)이 깨우고 삼동(三冬)엇지 보내나 작야 (昨夜)에 남풍南風이 슬슬 불어오드니 금일(今日)에 감우(甘雨)가 순순(順順) 오난구나 삼촌가절(三春佳節)은 자치 없이 가쓰나 산천(山川)에 초목(草木)은 춘색(春色)임의 늣난구나 어려서부터 미국(美國)이라 하더니 와서 보니 산천 평평(山川平平)하고 모든 것이 풍부하고나 이 몸이 병이 드러 진퇴 양난일세 식다(食多)하 육신상고(肉身上苦)라 인생일장 춘몽
(人生一場 春夢)인데 1978년 5월 우연이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前後山川(전후산천)이 錄色(록색)이로구나 가지가지에 꽃이 피어 점점 홍하니(불거쓰니) 별과 나비난 來相(래상) 접하난구나 春草(춘초)난 年年(년년) 綠(록)하건만 人生(인생)은 귀 불귀하난구나 조제견불눈이고화낙 春山空(춘산공)새가 울어도 조제하니 봄 산이 비(빈) 것 갓고꽃이 떨어지니 봄 산이 빈 것 갓고새가 우러도 눈물을 보지 못한다.녹음방초난(는) 萬山(만산)에 홍녹이고歲月(세월)은 임의(이미) 여름철이 가난(는)고나한국에서 위암수술치료를 받으신 후 회복 중 미국으로 이민 오신 아버지의 그린카드 사진아버님이 미국에 오신 후 많이 회복되셨다. 왼쪽으로부터 아버지, 자부. 저, 손녀 진이 아버님을 나의 승용차 카딜락에 모시고 나이아가라폭포 구경을 떠나기 바로 전 차를 타신 아버님. 서 있는 큰 손자 동형 사진 아버님이 손자들과 같이 손녀 딸 진이, 작은 손자 건형, 큰 손자 동형 사진 아버님을 모시고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 사진 위암수술치료를 받으시고 추적 치료를 받는 중 위암 재발을 염려하시면서 한국에 두고 온 막네 딸 윤숙이와 다른 가족을 걱정하시는 아버님 정월 초 하루날 우리 집에 초청해 모신한 손님들과 가족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붉은 조끼를 입으신 아버지, 그 왼쪽 옆 자부, 그 왼쪽 옆 손자 동형 그리고 권사님, 장노님. 나의 처와 막내 여동 생, 베이스 철강 대표 이윤숙. 미국에게 오신 후 망내 딸을 그렇게 보고 싶지만 큰 아들과 메누리에게 조금도 그런 말씀을 안 하시고. 한국에서 처음 듣고 처음 본 이윤숙 동생. I Love You. 사진 아버님의 손녀 딸 진이. 시인(?), 바이올린리스트(?), 싱거(?), 댄서(?), 바느질 가(?), 화가(?), 보석 만드는 여성(?) 손녀 딸 진이의 시 손녀 딸 나리, 나리는 변호사이고 남편은 판사.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No Matter What, I Love My Dad & Mom. June 18 2017 |